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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마드리드

레알마드리드의 역사, 클럽위의 클럽

by 사랑방대표 2020.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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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클럽 레알 마드리드의 역사,

 

레알마드리드의 홈구장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오늘은 세계적인 프로축구 클럽,

레알 마드리드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저희 와이프도 축구는 전혀 모르지만,

크리스티아노 호날두와 레알 마드리드는 알더 군요...

 

서론이 길었습니다.

바로 시작해보겠습니다.

 

 

 


 

 

백곰 군단, 레알 마드리드의 역사

초창기의 레알 마드리드

 

세계 최고의 프로축구 1부 리그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프로축구팀 레알 마드리드는

모든 축구선수들의 선망하고 갈망하는 명문 축구클럽입니다.

현재까지 115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뼛속까지 근본으로 가득 찬 클럽입니다.

 

 

사진-marca

" 벤치에 앉아 있더라도 레알 마드리드의 흰옷을 입고 싶어 "

라고 할 정도로 선수들의 꿈의 클럽이라고 합니다.

아무나 갈 수 없고, 아무나 올 수 없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스페인 국왕의 왕관이 씌워진 레알 마드리드 엠블럼에서

느껴지는 권력, 자부심, 그리고 보이지 않는 막강한 힘은

축구선수들의 가슴을 뛰게 하고 책임감을 갖게 만든다고 합니다.

 

 

사진-marca

레알 마드리드

1897년에 아마추어 학생들의 클럽 " 풋볼 스카이 "

라는 클럽명으로 시작됩니다.

이후 풋볼 스카이는 "뉴 풋볼 데 마드리드"와

"클럽 에스파뇰 데 마드리드"라는

2개의 클럽으로 갈라서게 되며

그중 " 클럽 에스파뇰 데 마드리드 " 가 현재의

레알 마드리드의 초창기 역사가 됩니다.

 

Estadio de Chamartín (현재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클럽 에스파뇰 데 마드리드"는

1902년 " FC마드리드 "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스페인 마드리드 차마르틴 구의 작은 시민구단 " FC마드리드"는

주변 지역의 작은 클럽들을 흡수 병합하며, 

초창기부터 강력한 팀이 되었습니다.

1902년 이후 창단 3년 만인 1905년에 스페인 국왕컵에서 

우승을 하며, 추 후 4 시즌 연속 국왕컵의 우승팀이 됩니다.

 

 

 

그렇다면, 레알(Real)의 칭호를 사용한 건 언제부터일까요?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

축구를 굉장히 좋아했던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는

자신의 대관식을 기념하면서 만든 대회인

" 킹스컵(=현재의 국왕컵(코파 델 레이) " 에서

국왕컵 4연패를 달성한 FC마드리드를 기념하면서

왕, 왕실, 왕족을 뜻하는 " 레알(Real) "이라는 칭호를

1920년 6월 29일에 하사하게 되었습니다.

 

 

레알마드리드의 엠블럼 변천사

그 이후,

FC마드리드는 국왕의 후원을 받는

왕족 또는 황족의 구단이라 불리며,

기존의 구단 엠블럼에 스페인 국왕의 왕관을 씌우고

FC마드리드가 아닌, " 레알 마드리드 "라고 클럽명을 바꾸며

레알 마드리드의 파란만장한 역사는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스페인 제2공화국, 그리고 왕정의 몰락

스페인 제2공화국 국기(에스파냐 공화국)

 

무너진 왕정,

때는 1931년 4월 14일, 스페인 제2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스페인 왕권은 약해지고 국왕은 망명되었습니다.

스페인 사회는 혼란에 휩싸이게 됩니다.

 

한편, 국왕의 지지를 받고 총애를 받는 레알 마드리드는

다시 FC마드리드라는 이름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왕권의 힘이 없고 폐지된 상황 속에서 왕족을 뜻하는

레알이라는 칭호는 사실상 겉치레일 뿐인 거죠.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마드리드 CF는 1931-1932 시즌에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며

다시금 전력을 대폭 강화시켰습니다.

 

마드리드 CF는 대거 영입한 선수들의 효과를 톡톡히 보며

10승 8 무 0패 전적으로 라 리가 첫 번째 우승에 성공하게 됩니다.

상승세를 받은 마드리드 CF는 그다음 해의 시즌인

1932-1933 시즌에도 연속으로 라 리가 우승을 하게 됩니다.

 

이후 3 시즌 연속 준우승에 그쳤지만 코파 델 레이(국왕컵)에서는

1934년 발렌시아 VS 마드리드 CF 우승

1936년 바르셀로나 VS 마드리드 CF 우승을 하게 됩니다.

 

 


 

스페인 내전 발발, 모든 스포츠 중단

시간은 흘러,

1936년 7월 17일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혼란스러운 스페인 제2공화국을 상대로 모로코에서

반란(쿠데타)을 일으키며, 스페인 제2공화국에 대응하는

스페인 내전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와 동맹을 맺은 나라 중 유명한 나라는

이탈리아 무솔리니, 그리고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있었습니다.

 

 

히틀러(좌), 프랑코(우)

히틀러와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힘이 더해진 걸까요.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1939년 마침내, 스페인 정권을 확립하게 됩니다.

내전이 끝난 후 마드리드 CF는 다시금 " 레알 "이라는 칭호를 달게 됐습니다.

 

대원수 프란시스코 프랑코

추가적으로 내전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스페인 내전이 끝난 1939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며,

며칠 전 축구화를 신었던 선수들까지

군화로 갈아신으며 전쟁에 나갔다고 합니다.

 

 

제2차 세계 대전까지 모두 끝난 후 레알 마드리드는

황폐해진 스페인과 축구장, 훈련장 그리고 선수단 리빌딩에 들어갑니다.

훈련장은 처참히 손상되었고 경기장마저 손상을 입었으며,

사망사고까지 있었던 혼돈의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또한,

레알 마드리드는 전처럼 상위권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1946,1947 2 시즌 연속으로 코파 델 레이 우승을 하였지만,

리그컵에서는 2위에서 5위를 머물며,

1947-48 시즌에는 리그 11위로 겨우 강등권을 면하게 되었었죠

 

 


 

전성기의 시작, 저승사자 군단 레알 마드리드

중반기의 레알 마드리드

푸스카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산티아고베르나베우

 

하지만, 왕족 레알 마드리드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으로 당선된

구단의 전설적인 선수 "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는 

이렇게 무너져 가는 레알 마드리드를 차마 볼 수 없었기에

전쟁 중 파괴된 차마르틴 구장(=현재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과

시우다드 데포르티바 훈련장을 다시 재건하고

구단의 명성과 위대함을 다시 세우고자 합니다.

1952년을 시작으로 라이문도 사포르타를 단장으로 임명하며,

페렌츠 푸스카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미겔 무뇨스, 레몽 코파, 호세 산타마리아

세계적인 선수들을 레알 마드리드 구단에 영입하고,

현재의 갈락티코스, 저승사자 스쿼드를 완성시킵니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의 레알 마드리드는

스페인 내전 전쟁으로 인해 침체된 분위기와 경기력을

극강으로 끌어올리며 유럽 최강의 팀으로 다시금 도약하게 됩니다.

 

전쟁으로 인해 리모델링 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1955년 1월 4일,

모든 보수공사가 끝나고, 레알 마드리드는 구단 회의를 통하여

차마르틴 경기장의 이름을 회장님의 존경심을 담아서

현재의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로 변경하였습니다.

 

 

금빛화살,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저승사자 군단 레알 마드리드는 1953-1954 시즌을 시작으로 

16년의 시즌 동안 라리가 12회 우승, 3회 준우승, 유러피언 컵 6회 우승, 2회 준우승

리그 15연승, 121경기 연속 홈 무패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역사에 남기게 됩니다.

저승사자 군단의 레알 마드리드는 1970년대까지 전성기를 이어갑니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1978년 7월 2일에는, 레알 마드리드의 전성기를 이끈 

"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 회장이 타계했습니다.

이 시기는 아르헨티나에서 월드컵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월드컵 기간 도중에 전 세계 모든 나라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사흘간의 애도기간을 선언했습니다.

 

 


 

1900년대 후반의 레알 마드리드,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1980년대 초반 레알 마드리드는,

부트라게뇨, 미겔 파르데사, 미첼, 마놀로 산치스, 마르틴 바스케스

총 5명의 레알 마드리드 유소년 아카데미 졸업생들로 

독수리 편대라는 별칭으로 1980년대 후반에 스페인은 물론 유럽을 제패하게 됩니다.

두 번의 UEFA컵 우승과 5 시즌 연속 스페인 리그 우승을 기록하며

코파 델 데이 1회,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3회 우승을 거두었습니다.

1990년대 초반에 극강의 독수리 편대는 바스케스, 부트라게뇨, 미첼이 

레알 마드리드를 떠나게 되면서 해체되었습니다. 

 

라울

에밀리오 부트라게뇨가 팀을 떠나게 되며, 

당시 레알 마드리드 감독이었던 호르헤 발다노 감독은

레알 마드리드 C에서 7 경기만에 무려 13골이나 기록한

라울을 1군으로 승격시키며 부트라게뇨를 대체하게 됩니다.

 

당시 나이 17세 124일의 나이로 1군 경기에 출전한

역대 최연소 선수로 잠깐 기록된 적이 있다.

라울은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첫 시즌 리그 우승을 거두게 됩니다.

추 후 라울은 레알 마드리드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선수가 됩니다.

 

 


 

2000년대의 레알 마드리드, 그리고 오늘

 

플로렌티노 페레즈

호베르투 카를로스, 구티, 미야토비치 등

전설적인 선수들과 레알 마드리드를 이끌어 가는 중,

2000년 여름에 신임 회장으로 부임한 플로렌티노 페레즈는

갈락티코스 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들을 레알 마드리드로 부르겠다 "

 

 

가장 이슈가 됐던 영입은 바로,

레알 마드리드의 라이벌 팀 바르셀로나의 주축

" 루이스 피구 " 의 영입이었습니다.

이 영입은 당시 최고의 비난을 받게 되었으며,

엘 클라시코 경기 도중 피구에게 돼지머리를 던지는

사건까지 발생하게 됩니다.

 

 

피구를 영입하고 레알 마드리드는

프랑스의 지단, 브라질의 호나우두, 영국의 베컴, 오언,

이름만 들어도 전설로 불리는 선수들을 

은하계 군단 멤버로 영입하게 됩니다.

 

 

하지만, 

레알 마드리드의 팀의 방향은

플로렌티노 페레즈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은 자존심이 강했고

감독은 그 선수들을 컨트롤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3년 동안 5번의 감독 교체가 되며,

레알 마드리드는 지휘관 없이 전쟁터에서 전쟁을 하며

모두 개인행동을 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정책을 펼치게 한

플로렌티노 페레즈 회장은 팬들에게 

신임을 얻지 못해 물러나고,

칼데론이 회장 자리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이끌며,

카펠로 감독이 이끄는 레알 마드리드는 4년 만에 

레알 마드리드를 리그 우승에 성공시킵니다.

 

 

리오넬 메시

하지만,

라이벌 바르셀로나는 

세 얼간이(사비, 이니에스타, 부스케츠)

그리고 축구의 신 메시를 앞세워 트레블(리그, 국왕컵, 챔스)

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달성하게 됩니다.

또 한 번 암흑기에 빠지게 됩니다.

 

 

 

무리뉴도 오라고해

이 힘든 시기에 페레즈 회장은

칼데론 회장을 끌어내리면서 

다시 한번 그렇게 욕먹었던 2번째 갈락티코를 

밀어붙이게 됩니다.

카카, 호날두, 알론소, 벤제마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스타성이 있는

선수들을 다시금 영입하고

 

인터밀란에서 트레블을 달성한 무리뉴 감독을

감독으로 임명합니다.

 

결과는 성공적이기보다는 평균이었습니다.

무리뉴 감독은 리그 승점 100점으로 

2011-12 시즌 리그 우승을 했지만,

 

선수단의 불화와 그토록 갈망하던 

챔피언스리그와 코파 델 레이에서 

매번 탈락하게 되며 상호 합의하에 구단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카를로 안첼로티

무리뉴를 뒤로하고 

페레즈의 선택은 " 카를로 안첼로티 "였습니다.

2013-14년 안첼로티는 지단을 수석코치로 임명하며,

베일을 영입하고 BBC(베일, 벤제마, 크리스티아노 호날두) 라인을 구축하여,

그토록 염원하던 " 라 데시마 " 총 10번째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하게 됩니다.

 

그 후 크로스, 나바스, 하메스를 영입하고 

UEFA 슈퍼컵(챔스우승팀 vs 유로파우승팀) 상대인 

스페인 리그 강호 세비야를 이기며 우승을 거두었습니다.

 

알론소, 디 마리아가 팀을 떠나고

2014-15 시즌은 어떠한 대회에서 승리를 하지 못하고

무관으로 마감을 하게 되며,

성격이 급한 페레즈 회장은 안첼로티를 해임시킵니다.

 

 

라파엘 베니테스

페레즈 회장의 선택은 베법사, 베니테스 감독입니다.

엘 클라시코 안방 경기에서 0-4로 대패하며,

징계로 인해 출전 자격이 없는 체리 세프가 경기에

출전을 시키는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지르고

코파 델 레이는 실격처리되어버립니다.

선수들 장악도 안되고 경기력이 너무나도 안 좋았기 때문에

페레즈는 베니테스를 시즌 도중 경질시켜버립니다.

 

 

페레즈는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명장이라는 감독들도 독이 든 성배를 함부로 마시지 않으려 하고

부담감과 책임감, 그리고 선수단 장악이 힘든 것을 알았던 거죠.

 

팬들과 관계자들은 지단을 임시로 선임하라고 합니다.

페레즈는 지단의 광팬이며, 지단 또한 레알의 광팬입니다.

지단은 안첼로티 챔스 우승 시절 수석코치로 경험이 있으며,

베니테스 부임 시절엔 레알 2군 감독이었습니다.

 

결국 페레즈는 긴가민가 하는 마음으로

1군 감독 경력이 없는 지단을 선임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전설은 시작되었습니다.

 

 

 

시즌 도중 부임한 지단 감독은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시키며,

11번째 우승을 하게 되고

2016-17 시즌에는 라리가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또 시켜버립니다.

12번째 우승으로 레알 마드리드는 2연패를 하게 됩니다.

2017-18 시즌에는 리그는 3위에 그쳤지만,

모두가 힘들다고 말했던 레알 마드리드의 챔피언스리그 3연패,

13번째 우승을 지단이 성공시키며,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명장의 반열에 오르게 되며,

전 세계 축구팬들에게 박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페레스 회장과의 불화로 인해 지단 감독은

갑작스럽게 기자회견을 열고 감독직에서 물러납니다.

 

3연패는 사실 기적에 가까운 운이 컸다는 걸 지단 감독도 알았던 거죠.

팀은 바뀌어야 4연패 5연패를 할 수 있다고 지단은 말했지만,

페레스 회장은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리모델링으로 인해 돈을 풀지 않았습니다.

지단은 결국 원하는 선수들을 영입하지 못하고,

박수를 받으며 자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갓단...

 

 

2018-2019 시즌에는 지단이 스스로 물러나고,

호날두가 유벤투스로 이적하게 됩니다.

전체적으로 흔들려버린 레알 마드리드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되어버렸습니다.

로페테기, 솔라리 감독 체제로 운영되었지만

결과는 심하게 실패작이었습니다.

 

 

페레스 회장은 지단에게 다시금 연락하여

지휘봉을 잡아달라고 부탁합니다.

지단은 레알 마드리드의 암흑기를 볼 수 없다며

몇 가지 요구사항과 함께 지휘봉을 다시 잡게 되었습니다.

 

레알마드리드 감독, 지네딘 지단

현재 2019-2020 시즌을 지휘하고 있으며,

아자르, 멘디, 요 비치 등 몇몇의 선수들을 영입했습니다.

아자르는 부상과, 폭발적인 드리블이

라리가에서 쉽게 먹히지 않아서

실망스러운 시즌을 보내고 있지만, 

점점 나아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제 레반테전에서 부상을 당했죠...)

 

요 비치는 너무 어린 나이면서 부담감과 책임감이 컸던지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으며,

 

멘디는 마르셀로를 벤치로 보내버리며 주전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수비력과 공격력이 뛰어난 선수입니다.

 

지단은 흔들리고 무너지는 레알 마드리드의 키를 잡고

역시나 지단답게 팀을 하나로 만들고 순항하고 있습니다.

챔피언스리그 16강 진출과, 라리가는 승점 2점 차이로 2위에 있습니다.

 

두서없이 작성한 글이 마침표를 찍을 때가 왔습니다.

수정사항이 필요한 내용이 있다면

댓글을 남겨주세요.

 

레알 마드리드 선수 소개로

또 한 번 인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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